“그는 자신의 젊은 여자친구들을 다른 재벌 친구들과 요트 위에서 공유했습니다. 그에게 결혼이라는 제도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저는 더 이상 그 굴욕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2014년 5월, 스위스 제네바 법정은 전 세계를 향해 충격적인 판결을 내놓았습니다. 러시아의 ‘비료왕’이자 프랑스 축구 구단 AS모나코의 구단주, 드미트리 리볼로블레프에게 그의 아내 엘레나에게 재산의 절반인 45억 달러(약 5조 원)를 지급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역사상 가장 비싼 이혼’이 탄생하는 순간. 23년간 남편의 성공을 묵묵히 내조하고 그의 끝없는 외도를 견뎌온 한 여성의 인내가 마침내 보상받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이 판결은 기나긴 싸움의 끝이 아닌,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1년 뒤, 항소심 재판부는 이 금액을 6억 4백만 달러(약 7천억 원)로 대폭 삭감해 버립니다. 5조 원짜리 승리는 한순간에 신기루처럼 사라졌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천문학적인 액수의 돈을 둘러싼 싸움이 아닙니다. 대학 캠퍼스에서 만난 순수한 연인이 러시아 신흥 재벌(올리가르히)이 되어가는 과정 속에서, 한 여성이 겪어야 했던 끔찍한 배신과, 남편이 부를 지키기 위해 동원한 교묘한 법적 장치에 맞서 10년간 자신의 권리를 위해 싸워야 했던 처절한 기록입니다.
💑 의대 캠퍼스 커플, 격동의 러시아에서 제국을 건설하다
1987년, 아직 소련의 그늘이 짙게 드리워져 있던 러시아 페름의 한 의과대학. 심장병을 공부하던 성실한 의대생 드미트리와 그의 동료 학생이었던 엘레나는 캠퍼스에서 만나 사랑에 빠졌고, 곧바로 결혼했습니다. 그들의 시작은 소박했지만, 시대는 거대한 변화를 앞두고 있었습니다.
소련 붕괴 후, 러시아는 혼돈의 자본주의 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의사였던 드미트리는 시대의 흐름을 읽고 과감하게 사업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는 칼륨 비료 회사를 설립했고, 이는 훗날 러시아 최대의 비료 회사 ‘우랄칼리’로 성장하며 그에게 막대한 부를 안겨주었습니다. 이 모든 과정에 아내 엘레나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단순한 아내가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남편의 가장 든든한 동반자였습니다.
- 격동의 시기를 함께 견딘 동지: 1990년대, 러시아의 사업 환경은 전쟁터나 다름없었습니다. 드미트리는 사업 파트너 살해 혐의라는 누명을 쓰고 11개월간 억울한 옥살이를 하기도 했습니다. 엘레나는 남편이 무죄로 풀려날 때까지, 두려움 속에서도 묵묵히 가정을 지키며 남편의 곁을 지켰습니다.
- 안정적인 가정의 구축: 남편이 사업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그녀는 두 딸의 양육과 가정을 온전히 책임졌습니다. 살해 위협이 끊이지 않자, 그녀는 남편의 권유에 따라 아이들을 데리고 스위스 제네바로 거처를 옮겨 ‘기러기 아내’의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저는 그의 시작을 함께했습니다. 그가 의사 가운을 벗고 사업가가 되었을 때, 그리고 수많은 위협 속에서 회사를 키워나갈 때, 저는 항상 그의 뒤에 있었습니다. 그 제국은 저의 인생이기도 했습니다.”
남편의 사업은 폭발적으로 성장했고, 그들의 삶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화려해졌습니다. 뉴욕의 센트럴파크 펜트하우스, 그리스의 섬, 모나코의 호화 저택, 그리고 수많은 예술 작품들. 하지만 부의 크기가 커질수록, 남편의 마음은 가정에서 점점 더 멀어지고 있었습니다.
💔 끝없는 외도, 요트 위에서 벌어진 굴욕적인 파티
‘비료왕’으로 거듭난 드미트리는 자신의 부와 여성 편력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그의 호화 요트에서는 매일같이 파티가 열렸고, 그 자리에는 늘 젊고 아름다운 여성들이 함께했습니다. 엘레나는 남편의 외도를 모르는 척, 오랫동안 인내했습니다. 하지만 남편의 배신은 도를 넘어섰습니다.
법정에서 엘레나는 남편의 충격적인 사생활을 폭로했습니다.
“남편은 자신의 요트에서 젊은 여자들과 파티를 여는 것을 즐겼습니다. 심지어 그는 자신의 ‘젊은 정복자’들을 다른 올리가르히 친구들과 공유하기까지 했습니다.”
남편에게 그녀는 더 이상 사랑하는 아내가 아니었습니다. 그저 ‘아이들의 엄마’이자, 대외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장식품에 불과했습니다. 수년간 스위스에서 홀로 아이들을 키우며 남편을 기다렸던 그녀에게, 이 사실은 참을 수 없는 굴욕과 배신감을 안겨주었습니다. 23년간 쌓아온 신뢰와 사랑이 완전히 무너져 내리는 순간이었습니다.
2008년 연말, 엘레나는 마침내 결심을 굳혔습니다. 그녀는 스위스 법원에 이혼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그녀는 지난 세월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요구했습니다. 바로, 결혼 기간 동안 함께 이룩한 재산의 절반이었습니다.
⚖️ 5조 원에서 7천억으로… 롤러코스터를 탄 10년의 전쟁
이혼 소송은 전쟁과도 같았습니다. 드미트리는 자신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했습니다. 그는 이혼 소송이 제기되기 3년 전인 2005년, 이미 회사 지분을 포함한 막대한 자산을 자신의 두 딸 이름으로 된 키프로스의 신탁 계좌로 옮겨 둔 상태였습니다. 자신의 재산이 아니므로 분할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엘레나는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6년간의 지리한 싸움 끝에, 2014년 5월, 1심 법원은 엘레나의 손을 들어줍니다. 재판부는 신탁으로 이전된 재산까지 모두 부부 공동 재산으로 판단하고, 드미트리에게 재산의 절반인 45억 달러를 지급하라고 판결했습니다. 엘레나의 변호인은 “법은 누구에게나 평등하다는 것을 보여준 위대한 승리”라며 환호했습니다.
하지만 이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드미트리는 즉각 항소했고, 1년 뒤인 2015년 6월, 스위스 항소법원은 1심 판결을 완전히 뒤집었습니다.
항소심 재판부는 드미트리가 2005년에 신탁으로 옮긴 재산은 이혼과 무관하게 자녀들을 위한 것이었다는 그의 주장을 받아들였습니다. 그 결과, 재산 분할 대상 액수가 급격히 줄어들었고, 엘레나가 받을 돈은 45억 달러에서 6억 4백만 달러로 곤두박질쳤습니다. 5조 원짜리 판결이 한순간에 7천억 원으로 쪼그라든 것입니다.
엘레나는 다시 대법원에 상고하며 싸움을 이어가려 했습니다. 하지만 10년에 걸친 기나긴 소송에 지친 두 사람은, 2015년 10월, 마침내 법정 밖에서 최종 합의에 이릅니다. 최종 합의 금액은 비밀에 부쳐졌습니다. 롤러코스터 같았던 세기의 이혼 소송이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습니다.
비록 최종 금액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엘레나의 10년간의 투쟁은 전 세계에 중요한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거대한 부와 권력을 가진 재벌 남편이라도, 아내의 정당한 권리를 함부로 짓밟을 수 없다는 것. 그리고 교묘한 법적 장치를 통해 재산을 은닉하려는 시도는 결국 법의 심판대에 오르게 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녀가 최종적으로 얼마를 받았는지는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녀는 이 싸움을 통해 잃어버렸던 자신의 이름과 존엄성을 되찾았기 때문입니다.
📜 판례 해설
본 콘텐츠는 2008년에 소송이 시작되어 2015년에 최종 합의로 마무리된 드미트리 리볼로블레프와 엘레나 리볼로블레바의 이혼 사례를 바탕으로 제작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스위스 법원에서 진행되었으며, 판결이 1심과 2심에서 극적으로 뒤바뀌며 큰 화제를 모았습니다.
1심 재판부(2014년)는 남편인 드미트리가 자녀 이름의 신탁으로 옮긴 재산까지 부부 공동재산으로 판단하여 45억 달러라는 기록적인 재산 분할 판결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항소심 재판부(2015년)는 신탁 재산의 독립성을 인정하여 이 부분을 분할 대상에서 제외하고, 재산 분할 액수를 6억 4백만 달러로 대폭 삭감했습니다.
이 사건의 핵심 법적 쟁점은 ‘이혼을 예상하고 재산을 은닉할 목적으로 신탁을 활용했는가’ 여부였습니다. 1심과 2심의 판단이 극명하게 엇갈린 것은, 신탁 설립 시점과 목적에 대한 해석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최종적으로 양측이 대법원 상고를 앞두고 비공개 합의에 이르면서, 이 쟁점에 대한 사법부의 최종 판단은 내려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 사례는 국제적인 이혼 소송에서 해외 신탁 재산의 분할 가능성에 대한 중요한 선례와 논점을 남겼습니다.
⚠️ 법률적인 문제에 대한 조언이나 상담은 반드시 자격을 갖춘 변호사와 진행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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