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고의 청구를 기각한다.’ 판사님의 목소리가 법정에 울리는 순간, 세상이 무너졌습니다. 15년... 제 인생의 절반을 송두리째 기만한 남편을 심판해 달라고 외쳤는데, 법은 제게 '유책배우자'라는 낙인을 찍었습니다. 제 외로움이, 그의 15년 거짓말과 같은 무게였단 말인가요?"
스무 해 넘게 이어온 결혼 생활의 진실은 추악했습니다. 남편에게는 15년간 만나 온 다른 여자가 있었습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후, 저는 배신감과 외로움 속에서 저 역시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몇 년을 지옥 속에서 고민하다 용기를 내 이혼 소송을 제기했지만, 법원은 제 손을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법은 남편의 긴 배신을 '제척기간'이라는 법률 용어 뒤에 숨겨주고, 저의 잘못을 더 크게 보았습니다. 이것은 이혼 소송에서 패소한 한 여자의 억울하고도 처절한 고백입니다.
프롤로그: 법정에서 울려 퍼진 '기각'이라는 메아리
2023년 겨울, 저는 차가운 법정에 서 있었습니다. 남편의 15년 외도를 입증할 녹취와 블랙박스 영상 자료를 산더미처럼 제출한 뒤였습니다. 당연히 이길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아니, 이겨야만 했습니다. 저의 짓밟힌 20년 세월을 보상받고, 이 지긋지긋한 혼인 관계를 끝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으니까요.
하지만 판결은 제 기대를 무참히 박살 냈습니다. 판사님은 제게 두 가지를 지적했습니다. 첫째, 남편의 부정행위를 안 날로부터 6개월이 지났기에 '제척기간'이 지나 이혼 사유로 삼을 수 없다는 것. 둘째, 저 역시 다른 남성과 부적절한 관계에 있었기에 혼인 파탄의 주된 책임이 저, 즉 유책배우자에게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원고의 이혼 청구를 기각한다."
'기각'. 그 세 글자가 제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그럼 저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15년간 저를 속인 남자와, 법적으로 여전히 '부부'로 살아야 한다는 말인가요? 법정의 냉정한 논리 앞에서 제 피눈물과 상처는 아무런 힘이 없었습니다. 모든 것의 시작은 4년 전 그날 새벽이었습니다.
그날 새벽, 우리 집 초인종을 누른 여자
2019년 3월의 어느 새벽, 잠을 깨운 것은 날카로운 초인종 소리였습니다. 남편은 아직 귀가 전이었습니다. 누구일까 의아해하며 인터폰을 확인한 순간, 화면 속 낯선 여자의 얼굴에 온몸이 굳었습니다. 잔뜩 취한 듯 비틀거리던 여자는 문을 열어달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습니다.
"여기 박서준 씨 댁 맞죠! 문 열어요, 아줌마! 나 서준 씨 여자친구예요!"
심장이 쿵 내려앉았습니다. 마침 귀가하던 남편이 그 여자와 실랑이를 벌이는 모습이 인터폰 너머로 보였습니다. 남편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고, 여자를 황급히 끌고 어디론가 사라졌습니다. 잠시 후 집에 들어온 남편의 변명은 어설프기 짝이 없었습니다.
"아... 그냥 술집에서 만난 여자인데, 술 취해서 실수한 거야. 신경 쓰지 마."
그 말을 끝으로 남편은 도망치듯 집을 나가버렸고, 무려 한 달 동안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 한 달 동안 저는 지옥을 경험했습니다. 의심과 불안, 모멸감에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지만, 진실이 무엇일지는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15년의 배신, 블랙박스에 담긴 진실
남편이 집을 나간 지 한 달쯤 되었을 때, 저는 무언가에 홀린 듯 주차장으로 내려가 남편 차의 블랙박스 메모리 카드를 꺼내왔습니다. 제발 아무것도 없기를 바라면서도, 진실을 확인해야만 이 고통을 끝낼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컴퓨터에 연결한 블랙박스 영상은 판도라의 상자였습니다. 그 안에는 남편과 한 여자의 일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습니다. 그 여자는 새벽에 찾아왔던 그 여자가 아니었습니다. 또 다른 여자, '소외 I'라고 불리게 될 그 여자였습니다.
"자갸, 우리 다음 주 기념일인데 어디 갈까?"
"벌써 15주년이네. 시간 빠르다. 좋은 데 예약해볼게."
15주년. 그 단어를 듣는 순간, 저는 숨을 쉴 수 없었습니다. 15년. 제가 아이를 낳고 키우며, 남편의 아내로 살아온 시간의 대부분이었습니다. 그 긴 시간 동안 남편은 또 다른 가정을 꾸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블랙박스 속에서 그들은 너무나도 다정한 연인이었습니다. 저와는 단 한 번도 나눠본 적 없는 달콤한 대화, 애정 어린 스킨십... 제 결혼 생활 전체가 송두리째 부정당하는 기분이었습니다. 저는 바보였습니다. 15년 동안 남편의 완벽한 연극에 속아 넘어간,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아내였습니다.
나의 잘못, 외로움이 만들어낸 늪
남편의 배신을 확인한 후, 우리 집은 완벽한 빙하기에 접어들었습니다. 남편은 뻔뻔하게 집으로 돌아왔지만, 우리는 투명인간처럼 서로를 대했습니다. 대화도, 눈 맞춤도 없는 집. 그 끔찍한 정적 속에서 저는 서서히 말라갔습니다.
그때, 직장 동료 K가 다가왔습니다. 그는 제 힘든 사정을 눈치챘는지, 점심시간마다 제 이야기를 들어주고 따뜻한 커피를 건네주었습니다. 그의 위로에 얼어붙었던 마음이 조금씩 녹아내렸습니다. 그래서는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저는 그에게 기대기 시작했습니다. 외로움이, 사무치는 고독이 저를 늪으로 밀어 넣었습니다. 남편에 대한 복수심도 있었을 겁니다. '너만 하라는 법 있냐'는 치기 어린 마음도 있었습니다.
K와의 관계는 명백한 제 잘못입니다.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감히 말하건대, 그 관계는 15년간 저를 유령처럼 취급한 남편이 만든 결과물이었습니다. 텅 빈 껍데기만 남은 결혼 생활 속에서, 저는 살아있음을 느끼고 싶었습니다. 누군가에게 여자로, 인간으로 존중받고 싶었습니다. 그 갈증이 저를 죄의 길로 이끌었습니다.
냉정한 법의 잣대: 제척기간과 유책주의
몇 년간의 지옥 같은 고민 끝에, 저는 이혼을 결심했습니다. 제 잘못을 알기에 위자료는 바라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이 족쇄 같은 혼인 관계를 법적으로 끝내고 싶었습니다. 남편의 15년 외도 증거는 차고 넘쳤기에, 이혼 자체는 어렵지 않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법정에서 마주한 현실은 냉혹했습니다. 남편 측 변호사는 저의 외도 사실을 먼저 공격했습니다. 그리고 결정타를 날렸습니다.
"원고는 피고의 부정행위를 2019년 4월경에 알았습니다. 그러나 소송은 그로부터 3년 10개월이 지난 2023년 2월에 제기했습니다. 민법 제841조에 따라 부정행위를 안 날로부터 6개월이 지나면 이혼을 청구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원고의 주장은 제척기간 도과로 이유 없습니다."
제척기간. 생전 처음 들어보는 법률 용어였습니다. 남편의 15년 배신이, 제가 그 사실을 안 지 6개월이 지났다는 이유만으로 법적인 '이혼 사유'가 될 수 없다는 사실에 망연자실했습니다. 제가 그 긴 시간 동안 왜 바로 소송하지 못했는지, 얼마나 많은 고민과 두려움 속에서 살았는지 법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저 '6개월'이라는 숫자만 중요할 뿐이었습니다.
결국 법원은 남편의 15년 외도는 제척기간으로 논외로 하고, 현재 시점에서 부정행위를 저지른 저를 혼인 파탄의 주된 책임이 있는 '유책배우자'로 판단했습니다. 그리고 유책배우자의 이혼 청구는 받아들일 수 없다며, 제 소송을 기각했습니다.
승자 없는 이 지옥에서
저는 졌습니다. 남편의 오랜 배신에도 불구하고, 법적으로 저는 그와 이혼할 수 없는 '죄인'이 되었습니다. 이 판결의 결과는 무엇일까요? 저는 앞으로도 저를 기만한 남자와 서류상 부부로 살아야 합니다. 그는 자신의 잘못에 대해 어떤 법적 책임도 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정말 법이 추구하는 정의인가요?
물론 저의 잘못이 가볍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15년의 기만과, 외로움 끝에 저지른 제 잘못이 어떻게 같은 무게로 측정될 수 있는지, 아니 어떻게 제 잘못이 더 무겁다고 판단될 수 있는지 저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 판결로 인해 저는 승자 없는 이 지옥 같은 혼인 관계에 영원히 갇히게 되었습니다. 억울하지만, 이제는 누구를 탓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판례 해설
이 이야기는 춘천지방법원 2023 판결을 바탕으로 재구성되었습니다. 이 판결은 이혼 소송에서 매우 중요한 두 가지 법리, '제척기간'과 '유책주의'를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 ⏰ 부정행위의 제척기간 (민법 제841조): 배우자의 부정행위를 이유로 이혼 소송을 제기하려면, 그 사실을 '안 날로부터 6개월, 그 사유가 있은 날로부터 2년' 이내에 해야 합니다. 이 기간이 지나면, 설령 명백한 부정행위의 증거가 있더라도 그것을 이혼 사유로 주장할 수 없게 됩니다. 이야기 속 원고가 남편의 15년 외도를 알고도 약 4년 뒤에 소송을 제기했기 때문에, 법원은 제척기간이 지났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왜 바로 소송을 제기하지 못했는가' 하는 개인적인 사정은 법적으로 고려되기 어렵습니다.
- ⚖️ 엄격한 유책주의 원칙: 우리 법원은 혼인 파탄에 주된 책임이 있는 배우자(유책배우자)가 제기하는 이혼 청구를 원칙적으로 허용하지 않습니다. 이 사건에서는 양측 모두에게 잘못(쌍방 유책)이 있었지만, 법원은 원고(아내)가 제척기간이 지난 남편의 잘못을 주장하고 있으며, 원고 자신도 부정행위를 저질렀다는 점을 들어 혼인 파탄의 주된 책임이 원고에게 있다고 보았습니다. 따라서 유책배우자인 원고의 이혼 청구를 기각한 것입니다. 이는 '자신의 잘못으로 가정을 파탄 낸 사람은 스스로 이혼을 청구할 자격이 없다'는 유책주의 법리를 재확인한 판결입니다.
- 📜 사건의 시사점: 이 판결은 법이 감정이나 도덕적 비난의 크기가 아닌, 정해진 법리와 요건에 따라 냉정하게 판단함을 보여줍니다. 배우자의 부정행위를 알게 되었다면, 이혼을 원할 경우 반드시 제척기간 내에 법적 조치를 취해야 함을 시사합니다. 또한, 자신의 잘못이 있는 경우 이혼 소송에서 매우 불리한 위치에 놓일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법률적인 문제나 소송과 관련된 구체적인 상담은 반드시 전문 변호사와 진행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