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야, 나만 믿어. 우리 사이에 어떻게 돈 가지고 서운하게 그래. 내가 다 알아서 할게."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다정했다. 하지만 그 다정함이 내 모든 것을 무너뜨리는 칼날이 될 줄이야. 내 통장에서 그의 계좌로 265,000,000원이라는 숫자가 찍히기까지, 나는 단 한 번도 그를 의심하지 않았다. 아니, 의심하고 싶지 않았다.
장밋빛 미래, 그 달콤한 속삭임의 시작
우리 부부, 남들처럼 평범하게 시작했다. 팍팍한 월급에도 서로를 의지하며 미래를 그렸다. 남편 B는 언제나 내게 더 넓은 집, 더 안락한 미래를 약속했다. 그는 유난히 부동산 뉴스에 밝았고, 좋은 집을 사서 재산을 불리자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선영아(가명), 지금이 기회야. 이 동네에 괜찮은 아파트가 나왔는데, 우리 돈을 합치고 조금만 대출받으면 충분히 살 수 있어. 나만 믿어봐.”
2021년 6월의 어느 날, 남편의 목소리는 유난히 들떠 있었다. 그의 눈은 희망으로 반짝였고, 나는 그 빛에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시작이었다. ‘우리 집’이라는 꿈을 위해 나는 내 이름으로 된 예금과 적금을 깨기 시작했다. 첫 송금액은 그리 크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요구는 점점 대담해졌다.
“계약금이 조금 부족하네. 자기한테 있는 돈 조금만 더 보내줘.”
“중도금 날짜가 다가오는데 현금이 약간 모자라. 급한 대로 자기 돈 먼저 쓰자.”
나는 의심 없이 내 통장의 잔고를 그의 계좌로 옮겼다. ‘부부 사이에 내 돈, 네 돈이 어디 있어. 다 우리 돈이지.’ 그렇게 스스로를 위안하며. 송금 기록은 차곡차곡 쌓여갔지만, 그가 말한 ‘우리 집’에 대한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신뢰의 균열, “우리 사이에 차용증을 쓰자고?”
시간이 흐를수록 불안감은 안개처럼 피어올랐다. 송금한 횟수는 수십 번을 넘어섰고, 액수는 눈덩이처럼 불어나 2억 원을 훌쩍 넘겼다. 하지만 우리에겐 여전히 ‘우리 집’이 없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자기야, 우리 집 계약은 어떻게 되어가? 등기부등본이라도 한번 보여주면 안 될까?”
그 순간, 남편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말을 더듬었다.
“아, 그거... 거의 다 됐어. 마무리 단계야. 뭘 그렇게 걱정해.”
그의 석연치 않은 태도에 나는 처음으로 ‘뭔가 잘못됐다’는 강한 예감을 느꼈다. 며칠을 끙끙 앓던 나는 용기를 내어 말했다. 액수가 너무 커지니, 형식적으로라도 우리 사이에 문서 하나를 남겨두자고. 그저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하자는 내 말에 남편은 불같이 화를 냈다.
“지금 나를 못 믿는 거야? 우리가 어떤 사이인데! 부부 사이에 차용증을 쓰자고? 너 정말 서운하게 할래?”
그의 격한 반응에 나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를 의심하는 내가 나쁜 아내가 된 것만 같았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는 죄책감이 나를 짓눌렀다. ‘그래, 무슨 일이 있겠어. 내 남편인데.’ 나는 다시 한번 불안감을 꾹 눌러 담았다. 하지만 그 신뢰는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깨어지고 말았다.
배신의 민낯, 주식과 코인에 녹아내린 내 돈
결정적인 증거는 우연히 발견됐다. 남편이 자리를 비운 사이, 그의 컴퓨터 화면에 떠 있는 주식 거래 프로그램 창을 보고야 말았다. 파란색으로 도배된 마이너스 수익률, 그리고 내가 그에게 보냈던 돈과 정확히 일치하는 투자 원금. 심장이 쿵, 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우리 집’ 계약금과 중도금이라던 내 피 같은 돈은 존재하지도 않는 아파트가 아니라, 남편의 주식 계좌와 가상화폐 지갑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었다. 그는 내 돈으로 위험천만한 투기판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기분이었다.
“이게... 이게 다 뭐야?”
내 추궁에 남편은 처음에는 발뺌하다가, 이내 모든 것을 실토했다. 집값은 너무 비싸고, 월급만으로는 답이 없어서 한 방에 불려주려고 했다는 변명. 그는 내게 용서를 구했지만, 이미 내 마음속 신뢰의 댐은 무너져내린 후였다. 2년이라는 시간 동안 내가 그에게 송금한 돈은 총 2억 6천 5백만 원. 내 청춘과 희망이 담긴 돈이었다. 그 돈은 이제 남편의 실패한 투자의 잔해로만 남아있었다.
홀로 선 법정, 마지막 희망을 걸다
사랑은 배신으로 끝났고, 남은 것은 처참한 현실뿐이었다. 남편에게 돈을 돌려달라고 요구했지만, 그는 "투자 실패로 이미 다 잃었다. 줄 돈이 없다"는 말만 반복했다. 심지어 그는 적반하장으로 나왔다.
“당신도 부자 될 생각에 동의한 거 아니었어? 이건 우리 공동의 투자였고, 실패도 같이 책임져야지! 그리고 원래 부부끼리 준 돈은 그냥 준 거지, 어떻게 갚으라고 할 수가 있어?”
기가 막혔다. 그의 주장은 내가 그에게 돈을 ‘증여’했거나, ‘공동 투자’를 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단 한 번도 투기에 동의한 적이 없었다. 오직 ‘우리 집’이라는 그의 말을 믿었을 뿐이다. 더 이상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고 판단한 나는 마지막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바로 내 남편을 상대로 한 ‘부당이득금 반환 청구’ 소송이었다.
법정에 서는 날,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가장 사랑했던 사람과 원고와 피고로 마주 앉는다는 현실이 지옥 같았다. 남편은 법정에서도 뻔뻔했다. 아내가 자발적으로 준 생활비였고, 부부 공동의 경제 활동을 위한 것이었을 뿐, 갚아야 할 빚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나는 그동안의 송금 내역, 그가 ‘집 계약금’을 핑계로 돈을 요구했던 메시지들을 증거로 제출하며 눈물로 호소했다.
정의의 저울, 법원의 판결은
결과는 길고 긴 기다림 끝에 나왔다. 재판부는 내 손을 들어주었다.
법원은 판결문에서 이렇게 밝혔다.
- ✔️ 부부라고 할지라도 일방이 다른 일방에게 상당한 거액의 돈을 송금한 경우, 이를 당연히 ‘증여’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 ✔️ 2억 6천 5백만 원이라는 금액은 통상적인 부부간의 생활비나 용돈으로 보기에는 너무나도 큰 액수이다.
- ✔️ 남편이 ‘집 계약금’ 등 명확한 목적을 말하며 돈을 요구했고, 아내는 그 목적을 신뢰하고 돈을 빌려준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 ✔️ 남편이 ‘차용증’ 작성을 거부하며 부부 사이의 신뢰를 이용한 점 등 제반 사정을 고려할 때, 이는 명백한 ‘소비대차(대여)’ 계약에 해당한다.
결론적으로 법원은 “피고(남편)는 원고(아내)에게 265,000,000원 및 이에 대한 지연손해금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법정에서 판결문을 듣는 순간, 그동안 억눌렸던 눈물이 터져 나왔다. 돈을 돌려받게 되었다는 안도감보다, 나의 진실이, 나의 억울함이 인정받았다는 사실이 더 기뻤다. 물론 이 판결이 깨져버린 신뢰와 상처로 얼룩진 내 마음을 온전히 치유해 줄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진실을 외면한 채 나를 기만한 사람에게 경종을 울리고, 내 소중한 재산을 지켜냈다는 것만으로도 이 싸움은 의미가 있었다.
📜 판례 해설
이 사건은 2024년 서울북부지방법원의 판결을 바탕으로 재구성되었습니다. 해당 판례는 부부 사이의 금전거래에 대한 중요한 법적 기준을 제시합니다. 핵심은 부부라는 특수 관계를 고려하더라도, 거액의 금전이 오고 간 경우 그 목적과 경위, 금액의 크기, 쌍방의 재산 상태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증여’인지 ‘대여’인지를 판단한다는 점입니다. 특히 ‘우리 사이에 뭘 그런 걸 따지냐’며 차용증 작성을 회피하는 것은 오히려 대여 관계를 뒷받침하는 정황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부부간의 신뢰도 중요하지만, 자신의 재산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법적 안전장치의 필요성을 일깨워주는 판결이라 할 수 있습니다.
※ 모든 법률적인 조언과 결정은 반드시 전문 변호사와의 상담을 통해 진행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