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고(아내)의 이혼 청구를 기각한다.”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 판사의 목소리가 귓가를 윙윙 울렸다. 차갑고 건조한 문장이 내 머릿속을 헤집었다. ‘기각한다…’. 잘못 들은 것이라고, 이건 현실이 아닐 거라고 스스로를 몇 번이나 부정했다. 내 옆 변호사의 굳은 얼굴, 그리고 피고석에 앉은 남편의 입가에 스치는 희미한 안도감.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나는 졌다. 내 배신감, 내 상처, 내 눈물은 법정에서 한낱 ‘증거 불충분’으로 치부되었다.
그의 핸드폰에서 발견한 상간녀와의 사진. 내 심장을 찢어발겼던 그 명백한 증거는, ‘이혼 사유가 되기엔 부족하다’는 법의 벽 앞에서 힘없이 부서져 내렸다.
우리가 ‘우리’였던 날들, 그 완벽했던 거짓말
2011년, 우리는 모두의 축복 속에 결혼했다. 듬직하고 다정한 남편, 곧이어 태어난 사랑스러운 두 아이. 우리의 삶은 순탄한 항해 같았다. 나는 그가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항구라고 믿었다. 사소한 다툼은 있었지만, 그건 어느 부부에게나 있는 일상의 작은 파도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를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그가 내민 ‘사랑’이라는 이름의 세계를 단 한 순간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는 늘 바빴다. 잦은 야근과 회식. 나는 그런 그가 안쓰러웠다. 가족을 위해 고생하는 남편을 위해 더 좋은 아내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했다. 따뜻한 저녁을 차려놓고, 늦은 밤 술에 취해 들어오는 그를 묵묵히 기다리는 것이 나의 역할이었다. 그 피곤함 뒤에 다른 여자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을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디지털 비수, 핸드폰 속의 낯선 여자
2022년 여름, 그 견고했던 믿음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그의 귀가 시간은 점점 늦어졌고, 핸드폰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잠결에 울리는 메시지 알림 소리에도 그는 화들짝 놀라며 화면을 감췄다. 내 안에서 의심의 싹이 자라기 시작했다. ‘아니야, 아닐 거야.’ 나는 고개를 저었지만, 한번 피어난 의심은 덩굴처럼 내 심장을 옥죄었다.
결국, 판도라의 상자를 열고야 말았다. 그가 깊이 잠든 새벽, 떨리는 손으로 그의 핸드폰 잠금을 풀었다. 그리고 사진첩에 들어간 순간, 나는 숨을 쉴 수 없었다. 그곳에는 내가 모르는 ‘그의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처음 보는 여자와 얼굴을 맞대고 환하게 웃고 있는 남편. 고급 레스토랑으로 보이는 곳에서 다정하게 와인잔을 기울이는 모습. 누가 봐도 연인이었다. 사진 속 그의 행복한 표정은 지난 11년간 나에게 보여줬던 그 어떤 미소보다도 찬란했다. 그 사진들은 수백 개의 비수가 되어 내 심장을 관통했다.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었다. 이것이 그의 잦은 야근과 피곤함의 진짜 이유였다.
“단 한 번의 실수였어” 라는 잔인한 변명
다음 날 아침, 나는 그에게 사진들을 내밀었다. 그는 처음에는 당황하더니, 이내 무릎을 꿇고 빌기 시작했다.
“여보, 미안해. 정말 미안해. 그냥 회사 후배인데, 어쩌다 보니 딱 한 번 실수한 거야. 정말 아무 감정 없어. 다시는 안 그럴게. 제발 용서해 줘.”
‘단 한 번의 실수’. 그의 변명은 너무나 상투적이고 잔인했다. 그 다정한 사진들이 어떻게 ‘실수’가 될 수 있는가. 하지만 그는 집요하게 매달렸다. 아이들을 봐서라도 가정을 깨지 말자고, 자신에게 마지막 기회를 달라고 애원했다. 그의 눈물은 진심 어린 반성이라기보다,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계산된 연기처럼 느껴졌다. 신뢰가 깨진 자리에는 그 어떤 진심도 와 닿지 않았다. 나는 그를 용서할 수 없었다. 나는 이혼을 요구했고, 그는 집을 나갔다.
법정, 배신보다 더 아팠던 시간
나는 이혼 소송을 제기했다. 명백한 외도의 증거가 있었기에, 싸움은 금방 끝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법정은 내가 생각했던 곳과 전혀 달랐다.
남편은 변호사를 통해 자신의 행위가 ‘일회성 실수’였음을 거듭 강조했다. 자신은 깊이 뉘우치고 있으며, 가정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싶은데, 아내가 과도하게 의심하고 용서하지 않아 관계가 파탄 난 것이라고 주장했다. 심지어 나를 상대로 이혼해달라는 반소까지 제기했다. 적반하장이었다.
순간, 내가 가해자가 되고 그가 피해자가 된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나는 그의 외도 사진을 증거로 제출하며 그의 주장이 거짓임을 호소했다. 하지만 재판은 점점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재판부는 내게 물었다.
“남편이 저렇게까지 반성하고 있는데, 관계 회복을 위해 노력해 볼 의향은 없으십니까? 아이들도 있지 않습니까.”
그 질문이 내 가슴을 후벼 팠다. 왜 상처받은 내게 ‘노력’을 강요하는가. 왜 배신당한 내게 ‘용서’를 종용하는가. 법정은 진실을 가리는 곳이 아니라, ‘가정을 유지하는 것’을 최고의 선으로 여기는 곳처럼 보였다. 나는 절망했다.
차가운 판결, 나는 어디로 가야 하나
그리고 마침내 판결의 날, 법원은 남편의 손을 들어주었다. 정확히는 누구의 손도 들어주지 않았다. 법원은 “피고(남편)의 행위는 부적절했으나, 이것이 혼인 관계를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파탄에 이르게 한 부정행위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고 했다. 또한 “피고가 관계 회복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점 등을 고려할 때, 아직 혼인 관계가 파탄에 이르렀다고 보기 어렵다”며 나의 이혼 청구를 기각했다. 그의 이혼 청구 역시 기각되었다.
결론은 ‘그냥 살라’는 것이었다. 배신한 남편과, 그를 믿지 못하는 내가 한 집에서, 아이들을 보며 살아가라는 것. 이 판결은 내게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위자료 청구는 당연히 기각되었다. 이혼이 안 됐으니, 위자료도 없었다. 나는 모든 것을 잃었다. 내 믿음, 내 결혼, 그리고 법에 대한 마지막 희망까지도.
📜 판례 해설
본 이야기는 2023년 서울가정법원의 이혼 청구 기각 판결을 바탕으로 각색되었습니다. 이 판례는 재판상 이혼에 있어 ‘혼인을 계속하기 어려운 중대한 사유’(민법 제840조 제6호)의 입증이 얼마나 엄격하게 요구되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법원은 배우자의 부정행위가 있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는 부족하고, 그 부정행위로 인해 부부 공동생활 관계가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파탄에 이르렀다는 점이 입증되어야 이혼을 명할 수 있다고 봅니다.
이 사건에서 재판부는 남편과 다른 여성의 다정한 사진 등 부적절한 행위는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일회성’인지 ‘지속적’인지 명확하지 않고, 남편이 관계 회복 의사를 강하게 표현하는 상황에서 혼인 관계가 완전히 파탄되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고 판단했습니다. 즉, 법원은 유책 사유의 존재와 더불어 ‘관계 회복 가능성’을 중요한 판단 기준으로 삼습니다.
이는 외도 증거를 확보했더라도 상대방이 ‘한 번의 실수’라며 관계 유지를 주장할 경우, 이혼 청구가 기각될 수 있는 현실을 보여줍니다. 이 판결은 피해를 입은 배우자에게는 매우 가혹하게 느껴질 수 있으며, 법이 규정하는 ‘혼인 파탄’의 기준과 개인이 느끼는 ‘신뢰 파탄’ 사이의 괴리를 드러내는 판결이라 할 수 있습니다.
※ 모든 법률적 문제와 결정은 반드시 전문가인 변호사와의 정식 상담을 통해 진행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