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띵동-”
현관문 너머로 들리는 알림 소리가 심장을 철렁 내려앉게 만든 지 오래되었다. 택배 기사님일까, 아니면 빚 독촉을 위해 찾아온 낯선 사람일까. 하루에도 수십 번씩 불안에 떨어야 했다. 문 앞에 수북이 쌓인 붉은색 우편물들. 법원의 지급명령, 대부업체의 채무 상환 최종 통보서… 그것들은 남편이 우리 가정에 남긴 파멸의 예고장이었다.
그가 ‘스포츠토토’라는 도박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는 동안, 우리의 소중한 보금자리는 1억 원이 넘는 빚더미에 깔려 서서히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 순간, 나를 지켜주기는커녕 자신의 빚을 위해 내 이름마저 팔아넘기려 했다.
성실했던 그 사람, 소박했던 우리의 꿈
2012년, 우리가 결혼할 때만 해도 남편 B는 누구보다 성실한 사람이었다. 작은 회사에 다녔지만, 땀 흘려 번 돈으로 가정을 꾸리는 것을 자랑스러워했다. 우리는 작은 행복에 감사하며 미래를 그렸다. 예쁜 아이를 낳고, 돈을 차곡차곡 모아 조금 더 넓은 집으로 이사 가는 것이 우리의 소박한 꿈이었다.
그는 좋은 남편이자 좋은 아빠였다. 퇴근 후에는 아이와 놀아주었고, 주말이면 함께 공원으로 나들이를 갔다. 나는 그런 그의 곁에서 안정감을 느꼈다. 이 사람이라면 평생을 믿고 의지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 평범한 행복이 ‘스포츠토토’라는 악마의 속삭임에 잠식당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취미일 뿐이야” 위험한 신호의 시작
모든 것은 사소한 내기에서 시작되었다. 2019년의 어느 날, 남편은 축구 경기를 보며 휴대폰으로 무언가를 열심히 들여다봤다. “스포츠토토에 만 원 걸었는데, 맞혔어! 오늘 치킨은 내가 쏜다!” 그는 아이처럼 기뻐했다. 나는 그저 스포츠를 더 재미있게 즐기는 소소한 취미려니,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하지만 ‘취미’는 금세 ‘중독’으로 변해갔다. 그는 경기가 없는 날에도 휴대폰을 손에서 놓지 못하고 온종일 스포츠 분석 글을 읽었다. 그의 대화는 온통 어느 팀이 이길지, 배당률이 어떤지에 대한 이야기뿐이었다. 그의 눈은 더 이상 나와 아이를 향하지 않았다. 오직 휴대폰 액정 속 시시각각 변하는 숫자들에만 고정되어 있었다.
불안한 마음에 “이제 그만하는 게 어떻겠냐”고 조심스럽게 말하면, 그는 버럭 화를 냈다.
“당신이 뭘 알아! 이건 그냥 취미라니까? 남들 다 하는 거야. 내가 알아서 해.”
그의 날 선 반응에 나는 더 이상 말을 꺼낼 수 없었다. 그저 내 예감이 틀렸기를, 정말 그의 말처럼 아무 문제 없기를 바랄 뿐이었다.
거짓과 배신, 1억 원 빚의 블랙홀
나의 위태로운 믿음은 한 통의 대출 연체 통지서 앞에서 산산조각 났다. 처음 보는 저축은행의 이름으로 날아온 우편물. 거기에는 남편의 이름과 함께 1천만 원이라는 빚이 찍혀 있었다.
내 추궁에 그는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렸다. 잃은 돈을 만회하려다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고 고백했다. 그는 내 손을 잡고 “다시는 도박에 손대지 않겠다”고, “이번 한 번만 용서해주면 새사람이 되겠다”고 맹세했다. 나는 차마 그를 외면할 수 없었다. 아이의 아빠였고, 내가 사랑했던 사람이었다. 나는 우리의 예금과 적금을 깨고, 친정에까지 손을 벌려 그의 빚을 갚아주었다.
하지만 그것은 끔찍한 실수의 시작이었다. 그의 맹세는 거짓이었다. 그는 잠시 잠잠한 듯하더니, 다시 도박의 늪으로 기어 들어갔다. 이번에는 더 교묘하게 나를 속였다. 월급은 이미 그의 손에 들어오자마자 도박 자금으로 사라졌고, 그는 제2금융권, 카드론, 심지어는 이자가 살인적인 대부업체에까지 손을 댔다.
빚은 순식간에 5천만 원, 8천만 원을 넘어 1억 원을 훌쩍 넘겼다. 집에는 하루가 멀다고 독촉 전화가 걸려왔고, 험상궂은 남자들이 집 문을 두드렸다. 나는 아이를 끌어안고 공포에 떨어야 했다. 그는 더 이상 나의 남편이 아니었다. 도박에 미친, 빚만 만들어내는 괴물일 뿐이었다.
마지막 선을 넘다, 나를 팔아넘긴 남편
모든 것이 망가졌다. 신뢰, 사랑, 그리고 우리의 재산까지. 그럼에도 내가 이혼을 망설였던 것은 오직 아이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내 마지막 남은 인내심마저 짓밟아버렸다.
그는 내 신분증을 몰래 가져가 내 명의로 휴대폰을 개통하고, 소액결제 대출을 받았다. 심지어 나를 속여 ‘사업 자금이 필요하다’는 거짓말로 대출 서류에 서명을 하게 했다. 그는 자신의 도박 빚을 갚기 위해 아내인 나를, 아이의 엄마인 나를 사기 행각의 도구로 이용한 것이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날, 나는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이 사람은 구제 불능이다. 이 지옥에서 벗어나는 길은 이혼뿐이다. 더 이상 그를 위해 내 인생과 내 아이의 미래를 저당 잡힐 수는 없었다. 나는 그를 상대로 이혼 소송을 제기했다.
텅 빈 피고석, 지옥에서의 탈출
남편은 마지막까지 비겁했다. 그는 법원에서 보낸 소장을 받고도 아무런 답변을 하지 않았다. 재판 날에도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텅 빈 피고석은 그가 저지른 모든 잘못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과 같았다.
재판은 허무할 정도로 빨리 끝났다. 판사님은 나의 고통을 인정해주셨다.
- ✔️ 피고(남편)는 장기간 스포츠토토 등 도박에 빠져 1억 원이 넘는 거액의 채무를 부담하였고, 이로써 가정 경제를 파탄에 이르게 하였다.
- ✔️ 이는 배우자 및 가장으로서의 의무를 심각하게 저버린 행위로, 혼인을 계속하기 어려운 중대한 사유에 해당한다.
- ✔️ 따라서 혼인 파탄의 주된 책임은 피고에게 있으므로, 원고와 피고는 이혼한다.
- ✔️ 피고는 원고가 겪은 극심한 정신적 고통에 대하여 위자료로 1,500만 원을 지급하라.
판결문을 받아 든 손이 떨렸다. 위자료 1,500만 원. 그가 남긴 1억 원의 빚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금액이다. 하지만 이것은 돈의 문제가 아니었다. 법이 나에게 ‘당신은 이제 그 사람의 빚에서 자유롭다’고, ‘새로운 삶을 시작해도 된다’고 허락해 준 탈출 허가증이었다. 앞으로 아이와 함께 살아갈 길이 막막하지만, 더 이상 빚 독촉에 시달리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만으로도 숨통이 트였다.
📜 판례 해설
본 이야기는 2024년 대전가정법원의 이혼 판결을 바탕으로 재구성되었습니다. 이 판례는 배우자의 상습적인 도박이 이혼에 이르는 과정을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재판부는 배우자 일방의 과도한 도박 행위와 그로 인해 발생한 거액의 채무, 그리고 가정 경제의 완전한 파탄을 명백한 재판상 이혼 사유(민법 제840조 제6호)로 인정했습니다.
특히 중요한 점은, 도박 행위 자체가 ‘부정한 행위’에 준하는 수준으로 평가될 수 있으며, 가정을 돌보아야 할 배우자로서의 부양 및 협조 의무를 극심하게 위반한 것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도박 중독에 빠진 배우자가 있다면, 다른 배우자는 이혼 소송을 통해 혼인 관계를 정리하고, 도박으로 인한 정신적 고통에 대한 위자료를 청구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 사건처럼 피고가 소송에 대응하지 않을 경우 ‘무변론 판결’을 통해 신속하게 승소 판결을 받을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 모든 법률적 문제와 결정은 반드시 전문가인 변호사와의 정식 상담을 통해 진행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