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고와 피고의 혼인 파탄 책임은 대등하므로 위자료 청구를 기각한다.’ 판사님의 그 한마디에 온몸의 힘이 빠져나갔습니다. 제 의심이, 그의 수상한 행적에 대한 제 분노가, 결국 그의 잘못과 같은 무게가 되어버린 겁니다. 법은 제게 이혼을 허락했지만, 제 30년의 상처에는 아무런 이름도, 책임도 붙여주지 않았습니다."
저는 남편의 외도를 확신했습니다. 심야에 단둘이 가게에서 술을 마시고, 이사까지 도와준 여자가 단순한 친구일 리 없다고 믿었습니다. 30년 결혼 생활의 마지막 자존심을 걸고 이혼 소송을 제기했지만, 법원은 제 주장을 '증거 부족'이라며 외면했습니다. 이혼은 시켜주되, 위자료는 한 푼도 없다는 판결. 혼인 파탄의 책임은 남편과 저, '쌍방에 대등하게 있다'는 말은 비수처럼 가슴에 꽂혔습니다. 이것은 명백한 배신 앞에서 무력하게 패소한 한 아내의 허탈한 기록입니다.
프롤로그: '책임은 동등하다'는 잔인한 선고
판결문을 받아 든 손이 힘없이 떨렸습니다. 주문(결론)은 간단했습니다. 첫째, 두 사람은 이혼한다. 둘째, 원고(나)의 위자료 청구를 기각한다. 이혼은 할 수 있게 되었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요? 아니요, 저는 지독한 패배감을 느꼈습니다. 제가 이 소송을 제기한 이유는 단순히 서류를 정리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남편의 잘못을, 그가 제게 준 상처를 법의 이름으로 확인받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법원은 제 손을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판결 이유를 읽어 내려가던 저는 결국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원고가 제출한 증거만으로는 피고들 사이에 부정한 행위가 있었다고 인정하기 어렵다.' 제가 밤새워 모은 증거들, 저를 잠 못 들게 했던 의심의 조각들이 '증거 부족'이라는 네 글자에 힘없이 부서졌습니다.
더 비참했던 것은 다음 문장이었습니다. '혼인관계 파탄의 주된 책임이 누구에게 있다고 단정하기 어렵고, 쌍방의 책임이 대등하다고 봄이 타당하다.' 결국 법은 '너도 잘못했다'라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게 어떻게 이렇게 될 수 있었을까요. 모든 것은 남편이 카페를 차리면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30년 차 부부, 카페에서 피어난 의심의 연기
1993년에 결혼해 아이 둘을 낳고, 저희는 평범한 30년을 보냈습니다. 아이들이 다 크고 나자, 퇴직한 남편은 작은 카페를 차려 소일거리를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그의 새로운 도전을 응원했습니다. 하지만 카페는 곧 부부 사이의 벽이 되었습니다.
남편은 집에 있는 시간보다 카페에 있는 시간을 더 좋아했습니다. 밤늦게까지 가게를 정리한다는 핑계로 귀가가 늦어졌고, 주말에도 카페에 나가 살다시피 했습니다. 그러던 중, 남편의 입에서 '피고 F'라는 여자의 이름이 자주 오르내리기 시작했습니다. 가게 단골손님인데, 인테리어 감각도 좋고 말도 잘 통해서 친하게 지낸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밤, 늦도록 들어오지 않는 남편이 걱정돼 카페 근처로 차를 몰았습니다. 가게 불은 켜져 있었고, 남편의 차와 함께 낯선 차 한 대가 서 있었습니다. 바로 F의 차였습니다. 저는 차 안에서 몇 시간을 기다렸습니다. 새벽 1시가 넘어서야 두 사람이 웃으며 가게에서 나왔습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제 안에서 무언가 무너져 내렸습니다.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유부남과 단둘이 심야까지 술을 마시는 게 정상적인 관계일까요? 제 의심은 그때부터 확신으로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증거가 아니라면, 대체 무엇이 증거란 말인가
저는 증거를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노련했습니다. 제가 잡을 수 있는 꼬리는 많지 않았습니다. 제가 확보한 '증거'라고는 고작 이런 것들이었습니다.
- 심야의 술자리: 남편과 F가 여러 차례 밤늦게까지 카페에서 단둘이 술을 마셨다는 사실.
- 이사 도우미: 별거를 결심하고 남편이 집을 나갈 때, F가 그의 이삿짐 나르는 것을 도와주었다는 사실.
- 지인들의 증언: "두 사람이 유독 친해 보였다"는 식의 주변 사람들의 막연한 이야기들.
저는 이 증거들이 남편의 부정행위를 입증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상식적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이었으니까요. 이 증거들을 가지고 남편을 추궁하자, 그는 "의부증 환자냐"며 오히려 제게 화를 냈습니다. "F는 그냥 친한 동생일 뿐이고, 힘들 때 의지가 되어준 고마운 사람"이라는 변명만 늘어놓았습니다. 우리의 대화는 매일같이 싸움으로 번졌고, 집은 전쟁터가 되었습니다.
제 의심과 그의 부인이 반복되면서 저희 관계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습니다. 그의 행동 하나하나가 의심스러웠고, 저는 그를 비난하고 원망했습니다. 그 역시 그런 저에게 지쳐갔습니다. 결국 저희는 이혼 소송이라는 마지막 길에 서게 되었습니다.
상처만 남은 판결: 이혼은 하되, 책임은 없다
법정에서 저는 제가 모은 증거들을 내밀며 남편과 F의 부적절한 관계를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남편 측 변호사는 "사회 통념상 용인될 수 있는 친분 관계"라며 모든 혐의를 부인했습니다. 법원의 시선은 냉정했습니다.
판사님은 제게 물었습니다.
"원고는 두 사람이 함께 모텔에 들어가는 것을 보았습니까? 애정 표현을 하는 문자 메시지라도 있습니까?"
그런 결정적인 증거는 없었습니다. 저는 그저 "정황상 명백하다"라고 외칠뿐이었습니다.
결국 법원은 '증거 부족'을 이유로 남편의 부정행위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민법 제840조 제1호(배우자의 부정한 행위)에 따른 제 이혼 청구는 기각되었습니다.
하지만 법원은 저희의 혼인 관계가 이미 파탄 난 것은 인정했습니다. 수년간의 불화와 갈등, 별거 상태 등을 고려할 때 더 이상 부부 관계를 회복하기는 불가능하다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민법 제840조 제6호(기타 혼인을 계속하기 어려운 중대한 사유)를 근거로 이혼 자체는 인용했습니다.
가장 가슴 아팠던 것은 위자료 부분이었습니다. 법원은 혼인 파탄의 책임이 쌍방에게 대등하다고 판단했습니다. 남편의 의심스러운 행동뿐만 아니라, 그에 대한 저의 지속적인 의심과 비난 역시 혼인 관계를 악화시킨 중요한 원인이라고 본 것입니다. 결국 '누구 한쪽이 더 잘못했다고 볼 수 없으니, 서로에게 위자료를 청구할 수 없다'는 결론이었습니다.
저는 이혼은 했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했습니다. 30년 결혼 생활의 끝에서 제 손에 남은 것은 깊은 상처와 '너도 똑같이 잘못했다'는 법원의 차가운 낙인뿐이었습니다.
판례 해설
이 이야기는 의정부지방법원 고양지원 2023 판결을 바탕으로 재구성되었습니다. 이 판결은 이혼 소송에서 '부정행위'의 입증 책임과 '혼인 파탄'의 책임 분배에 대해 많은 것을 시사합니다.
- ⚖️ 엄격한 부정행위의 입증 책임: 법원이 민법 제840조 제1호의 '부정한 행위'를 인정하기 위해서는, '부부의 정조의무에 충실하지 않았다고 인정될 만한 사실'에 대한 구체적이고 명백한 증거가 필요합니다. 이 사건처럼 심야에 단둘이 술을 마시거나 이사를 도와주는 등의 '정황 증거'만으로는 부정행위를 단정하기 어렵다고 본 것입니다. 배우자의 외도가 의심되더라도, 소송에서 이를 입증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임을 보여줍니다.
- 🔑 파탄주의를 수용한 이혼 인용 (민법 제840조 제6호): 법원은 특정 유책 사유(부정행위 등)가 명확히 입증되지 않더라도, 부부 사이의 신뢰가 깨지고 갈등의 골이 깊어져 더 이상 정상적인 혼인 생활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태라면 '기타 혼인을 계속하기 어려운 중대한 사유'로 보아 이혼을 인용할 수 있습니다. 즉, 혼인이 실질적으로 파탄에 이르렀다면 이혼을 허용하는 파탄주의적 요소를 우리 법원이 받아들이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 💔 '쌍방 대등 책임'과 위자료 청구 기각: 이 판결의 핵심입니다. 위자료는 상대방의 유책 행위로 인해 받은 정신적 고통에 대한 배상입니다. 그런데 법원이 혼인 파탄의 원인이 어느 한쪽에만 있지 않고, 양측 모두에게 대등하게 있다고 판단하면('쌍방 유책' 또는 '쌍방 대등 책임'), 각자의 잘못이 상쇄되어 서로에게 위자료를 청구할 수 없게 됩니다. 한쪽의 의심스러운 행동과 다른 한쪽의 과도한 의심 및 비난이 맞물려 관계를 파탄 낸 경우, 법원은 이처럼 양쪽 모두에게 책임을 묻는 경우가 많습니다.
- 📜 사건의 시사점: 이 판결은 '내 마음속의 확신'과 '법정에서의 입증'은 전혀 다른 문제임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이혼 소송, 특히 위자료를 청구하고자 한다면 감정적인 호소나 정황 증거만으로는 부족하며, 객관적이고 명확한 증거 확보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또한, 갈등 과정에서 보인 자신의 행동 역시 혼인 파탄의 책임으로 평가될 수 있음을 유념해야 합니다.
법률적인 문제나 소송과 관련된 구체적인 상담은 반드시 전문 변호사와 진행하시기 바랍니다.